포로시대와 안식

포로시대의 안식(안식과 남은 자들)

 

우리는 계속해서 안식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전체를 바라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전체 안에 안식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전 믿습니다. 여섯째 날까지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은 먼저는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한 창조의 사역에서 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실 만큼, 하나님께서 더 이상 손대실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던 세상은 완벽했습니다. 그 완벽한 세상을 하나님께선 바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전 안식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original blessing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의 목적이자 original blessing으로써의 안식이 죄로 말미암아 깨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열심은 다시 시작됩니다. 오늘 주제와 상관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잠시 안식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정리하고 포로시대와 안식을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죄로말미암아 잃어버린 안식을 인간들에게 돌려주시길 원하셨던 하나님의 열심은 구약전체에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이유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심으로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적어도 구속사역이 완성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안식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의 시작, 그 시작점엔 예배(제사)가 있습니다. 먼저 죄로 말미암아 안식이 깨졌음으로 제사를 통해 안식의 회복을 꿈꾸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제사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속을 알려주시는 상징,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상징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배를 통해서 실제로 잃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읽어버린 하나님의 임재를 예배를 통해서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안식의 시작이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바로 에배를 통해서 회복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로 대표되는 인간들은 예배 자체를 거부해 버렸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부정이 아니라, 예배를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거부, 하나님과 함께 함의 부정이었습니다. 깨져버린 안식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열심이 가인의 후손들의 에배의 거부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두번째 열심은 심판과 노아방주였습니다. 예배를 버리고, 육체의 소원대로 행하였던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동시에 순종하는 한 가족을 노아방주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은 인류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없어도 되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연합하여 자신들의 작은 재주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나라, 아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셔도 살아 나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갔습니다. 심판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하나님의 열심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세번 째 열심은 한 사람(족장)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안식을 이루며, 하나님이 안 계셔도 되는 에덴동산을 꿈꾸던 대다수의 사람 대신 한 사람(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과 동행하며 그 한 사람에게 복을 주며 그 한 사람들(아브라함, 이삭과 야곱과 요셉)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산 – 안식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들을 향한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도다.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므로 네가 형통하더이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안식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던 열심을 이루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십니다.

 

네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의 후손들을 통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과 함께 안식의 회복의 모델을 보이시는 것을 넘어서 한 민족 가운데 나타나는 안식의 회복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민족 전체와 동역하실 때와 한 사람과 함께 동역 할 때와의 가장 큰 차이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하며 함께 동역하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1로써의 하나님의 열심은 하나님의 처소를 두시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데 한 민족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조금 더 큰 차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4-2로써의 하나님의 열심은 바로 율법입니다. 한 민족을 한 사람처럼 통일하여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율법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4-2-1로써 율법은 약속의 표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래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은 안식(엔덴동산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계속 기억하게 하는 장치였습니다. 4-2-2로쎠의 율법은 에덴동산의 질서, 공동체의 최소한의 질서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편으로써 제사를 소개합니다. 율법은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성막에서 이뤄졌으니, 공동체 전체를 하나님과 동역하도록 하시는 첫번째 열심인 하나님의 처소(임재)와 같은 의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거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율법은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 가는 지 소개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에덴동산에서의 풍요로운 안식의 삶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 지 소개하고 계십니다.

다섯번째로의 하나님의 열심은 바로 정복하게 하시는 것(땅을 차지하게 하는 것, 체계적인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광야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여섯번째로의 하나님의 열심은 사사를 통한 신정정치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과 율법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풍성함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백성들을 통해선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승리를 보게 하셨습니다.

일곱번 째로의 하나님의 열심은 왕을 통한 신정정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동등한 형제요 자매로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각기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을 통한 풍성을 스스로 포기했을 때에, 하나님은 왕을 통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셨고, 각기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길로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참 좋았습니다. 다윗의 왕국과 솔로몬의 왕국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가 얼마나 풍성할 수 있는 지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이로 통해 하나님이 없이 세운 나라와 대비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가 얼마나 풍성할 수 있는지 충분히 보여 주셨습니다.

여덟번 째로의 하나님의 열심은 선지자를 통한 열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자, 그 왕을 다시 깨우는 사람.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자신의 선조 여로보함의 길로 갔더라) 왕들을 깨우는 역할로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딱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여로보함처럼 실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종교적인 시스템으로 바꾸지 마십시오. 르호보함처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마십시오. 이것이 선지들이 외친 메시지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홉 번째의 하나님의 열심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남은 자들을 통한 안식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하나님께서는 선지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왕과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돌아오지 않은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였고,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남유다까지 멸망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오랜 꿈이 무너진 것처럼 보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려졌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시려고 하셨던 안식의 삶도 물건너 가버린 것 같아 보입니다. 더 이상의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우리도 망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멸망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것처럼 하면 우리도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시스템으로 바꾸어 놓고선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끝까지 우기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도 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우리도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풍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기 때문입니다. 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 보내는 삶…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공의가 세워지고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 그래서 사자와 소가 함께 풀을 뜯을 수 있는 나라, 공동체, 에덴동산과 같은 삶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도 하나님과 함께 그 영광을 삶으로 살아내 보려고도 안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릴 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한 신학으로 피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신다. 칭의와 하나님의 견인이라는 신학적 견해를 여기에 바로 대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이 말씀에 부딪혀야 합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엄연한 성경적 진실, 역사적 진실 앞에서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1.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내지 않는 교회는 망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 서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다시 질문하고 싶어 집니다. 만일 교회가 망한다면 하나님의 열심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안식의 풍성을 결국 이루시지 못하시고 포기하시는 것이 되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시 이렇게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가인과 그 후손들을 대표되는 예배를 포기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열심은 실패한 것인가요? 노아방주를 통한 구원은 바벨탑의 사건을 통해 비춰볼 때에 실패한 것인가요? 가나안 땅 앞에서 결국 포기하고 돌아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열심은 실패하신 것인가? 수 많은 사사들을 통해서 구원의 기을 보이셨지만, 여지 없이 죄악의 길로 들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열심은 결국 실패한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을 통해 세ㅔ운 나라를 다시 이방신을 섬기도록 만들어 버린 수 많은 이스라엘의 왕들을 생각하면 결국 하나님의 열심은 실패한 것인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 입니다.

 

  1. 하나님의 열심은 남은자들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야와 하나님의 대화에서 이러한 면이 잘 드러납니다. 어떤 면에선 엘리야의 고백이 옳았습니다. 아합왕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엔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의 풍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엘리야 외에는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외에 내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자 7000을 남기리라. 여기에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7000명의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7000명을 남기게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을 재천명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실패하였어도, 난 포기 하지 앟겠다하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가 망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 땅으로 끌려가고, 하나님의 전은 무너지는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열심을 멈추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포로시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라고 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열심은 결코 남은자들에만 멈춰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지, 하나님과의 교통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니엘입니다.  생각해 보면 다니엘은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였고, 이방 땅에서 총리를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과 함께 하실 때에 이방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신 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나타내셨던 것과 같은 동일은 성과를 포로중에서도 다니엘을 통해서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실패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과 동역하며 풍성함을 누렸던 사람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기에 충분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포로귀환을 꿈꾸십니다. 즉 공동체를 통한, 한 민족을 통한, 한 나라를 통한 안식의 회복을 여전히 꿈꾸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미국은, 한국은 미국내 교회는 한국내 교회는 포로 때처럼 실패한 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남은자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노스필드 장로교회가 그 남은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떤 엉망같은 세상 가운데서라도 하나님과의 풍성한 사귐을 누리고, 그 분과 동역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남은 자들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바알에, 세상의 물질에 밉 맞추지도 무릎 꿇지도 않는 교회 되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노스필드 장로교회를 통해서 다시 한 민족이, 한 나라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동역함으로 한 나라 가운데 나타나는 안식의 회복이 남은 자인 노스필드 장로교회를 통해서 이뤄지기를 소원합니다. 먼저는 시카고 한인사회에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미주 한인사회에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미국과 두고온 조국을 위해 기도함으로, 나라 단위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거대한 하나님의 열심 가운데 우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준비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