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으로 읽는 신구약개론 – 안식과 사사

수요일마다 안식으로 읽는 신구약개론을 강의 반, 설교 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아직 안식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내 책임이 크다. 가끔은 아직 나도 정리가 덜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기에서 먼저 정리해 보려고 한다.

성경은 처음과 마지막이 같다. 성경은 안식으로 시작하여 안식으로 마친다. 즉, 창조의 목적인 안식으로 시작하여 새하늘과 새 땅의 창조와 그 후의 안식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역사는 안식이라는 주제 안에서 풀어진다.

창조 – 안식 – 타락 -안식의 깨어짐 – 안식의 회복(초림) – 안식의 완성(재림) 이라는 성경을 보는 큰 관점이 가능해 진다. 이렇게 보면 구약성경은 안식의 깨어짐과 안식의 회복 사이에 있고, 신약성경은 안식의 회복과 안식의 완성의 기다림 사이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처한 위치이다.

중략…
나중에 보충 필요…

안식과 사사시대

안식과 사사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안식과 정복을 먼저 잠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난 주에 먼저 살펴보았던 것처럼 광야시대는 안식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나타났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영의 양식(십계명과 율법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육의 양식(만나와 메추라기)도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곳엔 빈부의 격차도 없었다. 그곳엔 그들을 위협하는 대적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왜냐하면 불기둥 구름기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없는 곳에서 완벽한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타난 공동체가 바로 광야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였다. 에덴동산의 안식이 이미 회복된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곳에서 안식을 누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식은 그곳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수1:13 참조). 이 점에서부터 우리는 안식과 정복의 문제를 다루었다. 안식은 완벽한 종교적인 공동체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안식은 세상을 정복하는 것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지난 주에 여기서 우린 몇 가지 중요한 현재적 적용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각 교회들이 교회 안에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안식을 누릴 수는 없다. 여호수아의 세대처럼 교회들은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그럼 정복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죄의 심판의 의미가 있었다. 가나안 7족들의 죄악을 멸하는 것이다. 안식은 죄의 정복에서 온다. 안식은 타협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다스림에서 온다. 죄의 정복.
둘째, 정복은 우리 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안식은 대안을 제시할 때에 온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만들 수 있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성경적 교육이 실제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세상에 대안으로 내 놓아야 한다. 성경적인 경제는 어떤 모습인지 세상에 대안으로 내 놓아야 한다. 그것이 정복이다. 그 때에 안식이 이뤄진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모두 마찬가지이다. 안식은 세상을 뒤로하고서는 애초에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안식도 세상을 다스림과 함께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안식과 사사시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상 가운데 안식을 누려야 현재의 우리모습”과 같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모습은 단순히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뤘던 광야시대와도 분명 다르다. 우리는 자주 옛날 수도사들처럼 세상을 등지고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본정신이 아니라고. 그렇다고 현재의 시대를 치열하게 세상과 싸워야만 했던 정복의시대와도 분명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이미 기독교가 이 세대의 중요한 종교, 철학, 문화, 예술, 교육, 정치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상적인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누리는 참된 안식의 삶을 살 수도 있는 시대. 그래서 사사시대와 현대의 세대는 가장 비슷한 세대라고 말하고 싶다. 정복은 이미 이뤄졌고,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땅도 이미 차지하였고, 그 토록 원하는 정착이 이뤄진 것이다. 이제 그 안에서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성경 속 사사시대에는 안식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사사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안식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흔히 사사시대는 12번의 반복이라고 부른다. “죄 – 압제를 당함 – 간구 – 구원 – 망각 – 죄”라는 반복의 반복이 12명의 사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구원 이후 안식이 나타났어야 했는데, 그 사이 망각이 있었고, 다시 죄악의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것을 이 시대에 그대로 다시 적용하면 우리의 일상에서 죄로 인해 압제를 당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될 것이지만, 그것을 잊어버리면 결국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죄의 악순환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사시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그럼 망각이 문제인데, 도데체 무엇을 망각했다는 것인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사기 2장 10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즉,첫째,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 둘째, 여호와의 하신 일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사기 3장 3절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부러 남겨 두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전쟁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로보건데 이스라엘이 망각한 세번 째는 바로 정복이다. 하나님은 사사시대 동안 계속 정복을 알기 원하셨다. 정복을 통한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간단히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사사의 시대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와 가장 비슷하다. 그 세대는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는 세대였으나, 정작 누리지 못한 세대다. 지금처럼. 무엇이 문제인가? 망각이 문제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일(정복)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분명 잃지 않고, 하나님과 동거하며 동행하였던 광야시대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시길 원하셨던 안식의 세대라고 분명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과 짝하며 정착하는 것을 안식이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여기에 우리의 긴장이 존재한다. 주 임재 안에서 나의 나됨을 발견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아름다운 교회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안식이라 말할 수 없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동거하며 동역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안식이다. 그것이 오리지널 안식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거대한 구호를 외치며 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그렇게 외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어 볼일 때가 있다. 하나님은 간데 없고, 인본주의만 가득함을 본다. 이 역시 안식은 아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안식을 누릴 수 있나? 둘 다를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거해야 한다. 일상에서, 일상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보다 앞서면 안 된다.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한다. 사사기 시작은 그러했다. 우리가 올라가리이까? 정복을 하나님께 질문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후엔 그런 질문은 사라진다. 그냥 고통가운데 건져주시기를 외치는 부르짖음만 가득하다. 우리 일상의 삶은 어떠한가? 똑같다.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한다. 그러면 안식이 있다. 정복이 있다.
하나님과 동거하며 동역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어버릴래야 잊을 수 없다. 우리에게 나의 승리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하나님의 승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안식이다. 예수님 이름만 걸어놓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말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자기가 했다는 것도 다 알고, 스스로 자신의 영광과 유익을 내려 놓을 마음도 없는 것은 안식이 아니다.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 스스로가 나의 승리가 아니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싸움이어야 한다. 그래야 안식이다. 그래야 진짜 하나님과의 동역에서 온 승리이다.
그러면 정복하게 된다. 하나님과 동역해서 다른 것도 해보고 싶어진다.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과 동역해서 기쁨을 잃어가는 잔치집을 구원해보고 싶었던 것처럼. 그것이 정복이다. 슬픔을 정복하고, 아픔을 정복하고, 불평등을 정복하고, 가난을, 배고픔을, 묶임을 정복하는 일… 그 일을 예수님과 동거하며 그 분과 동역하며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안식이다.

결국 안식은 정복에서 이뤄진다. 그 정복은 하나님을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도 망각하지 않는데서 온다. 그래야 정복도 망각하지 않는다. 그래야 안식은 온다.